이주사목위원회
공지사항

[담화] 2026년 제112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담화

제112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담화(2025년 9월 27일) 가장 작은 이들이 주는 희망의 풍요로움  하느님의 놀라운 창조 신비 안에서 우리는 한 생명의 시작을 바라보며 기뻐합니다. 모든 아이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태어난 소중한 존재이며, 보호받고 사랑받으며 자라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곁에는 세상의 거친 파도 앞에서 홀로 흔들리고 있는 작은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주 아동들입니다.교회는 이 작은 이들이 하느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손을 잡아 주고, 보호하며, 함께 걸어가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112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을 맞아 특별히 레오 14세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교황께서는 우리에게 마태오 복음의 말씀,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18,5)를 떠올리게 하시며 “이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받아들여 줄 것을 호소하셨습니다.오늘날 이주민과 난민은 폭력, 인신매매, 착취, 신체적 심리적 학대 등 수많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아이들은 가장 약하고 취약한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삶의 자리를 선택할 수 없으며, 어른들이 만든 사회적 조건과 제도의 틈 속에서 상처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와 사회는 이 아이들을 더욱 특별한 사랑과 책임으로 돌보아야 합니다.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이주 아동들이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미등록 이주 아동, 부모와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다가 우리나라에서 함께 살고자 들어온 중도 입국 청소년, 전쟁과 박해를 피하여 이 땅에 온 난민 가족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주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사회에서 숨죽이며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깊이 성찰해야 하는 아픔입니다.이주 아동은 무엇보다도 생명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 안에서 보호받아야 합니다. 사회적 폭력에서 안전하게 지켜져야 하며,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하고,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친구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특권이 아니라 한 아이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권리입니다. 국가는 이 권리를 보장해야 하며, 교회와 사회는 그 권리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또한 이주 아동들은 문화와 언어의 장벽 때문에 부모와 갈등을 겪기도 하고, 학교와 사회 안에서 편견과 혐오의 시선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차별의 말과 냉대의 시선으로 아이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가장 행복하게 자라야 할 시기에 겪는 외로움과 두려움은 아이들의 정신적 고통뿐 아니라 신체적 아픔으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주 아동들에게는 심리적 상담과 정서적 지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공동체의 따뜻한 사랑이 필요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사회 밖으로 내몰린 이주민과 난민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시며, 구체적인 환대와 동행을 호소하셨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많은 본당 공동체가 있고, 그 주변에는 이미 많은 이주민과 난민,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멀리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취약한 이주 아동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본당 공동체가 함께 돌보고 동반해 주기를 간곡히 호소합니다.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일도 공동체가 함께하면 길이 열립니다. 본당 공동체가 한 아이를 기억하고, 한 가정을 돌보며, 그들의 삶에 기꺼이 동행할 때 그 아이들은 더 이상 외로운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소중한 구성원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언젠가 우리 사회에서 자신만의 빛을 밝히며, 다양한 문화와 언어, 경험과 재능으로 우리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며 우리는 세계의 청년들을 한국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맞이해야 할 청년들과 아이들은 먼 곳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가장 약하고 가까운 이웃, 곧 이주민과 난민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환대하는 일은 세계 청년 대회의 정신을 삶으로 실천하는 길이며, 공존과 동행의 문화를 교회가 먼저 이루어 가는 길입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곁에 있는 이주 아동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가장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들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은 곧 예수님의 손을 잡아 드리는 일입니다.우리가 이주 아동을 보호하고 사랑으로 함께할 때, 그들은 단지 도움을 받는 대상으로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건강하게 성장하여,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과 재능, 문화와 꿈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 새로운 희망과 풍요로움을 선물할 것입니다.가장 작은 이들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희망을 지켜 주고 길러 낼 때, 교회와 우리 사회는 더욱 넓고 따뜻한 공동체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하느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와, 우리 곁의 모든 이주 아동과 그 가족들에게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2026년 9월 27일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위원장 정 순 택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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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2026년 제112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교황 담화

레오 14세 교황 성하의2025년 제112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담화(2026년 9월 27일)이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라도(마태 18,10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해마다 맞이하는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은 복합적인 이주 현상의 다양한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올해 제112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주제는 “이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라도”입니다. 이는 이주와 피난의 경험을 직접 겪는 미성년자들과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돌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다음과 같은 주님의 약속을 환기시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강제 이주 미성년자들: 복합적이고 취약한 현실미성년자들은 전 세계적인 이주의 흐름 안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입니다. 이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들을 지니고 우리의 양심을 두드리는 구체적인 얼굴들입니다. 해마다 수백만 명의 어린이와 청소년이 전쟁과 빈곤, 폭력과 환경 재난, 그리고 그 밖의 비극적 사유로 고향을 떠나야만 합니다. 안타깝게도, 날이 갈수록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앙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책임은 막중합니다. 이주민 어린이들이 겪는 고통은 주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해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모와 형제자매, 친구를 잃은 채, 말로 다할 수 없는 가혹한 폭력 행위들을 목격한 매우 어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가족과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는 고통을 견디며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애쓰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부모와 함께 이주의 여정에 나섰음에도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처지에 놓이고 마는 미성년자들도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본국 송환 조치로 자기 부모와 헤어지게 된 자녀들의 비극적 상황도 잊을 수 없습니다.이미 너무나도 참혹한 이 상황에 다음과 같은 비극들이 더해집니다. 이주하는 과정에서 맞는 죽음, 인신매매, 착취, 무장 분쟁에 투입하기 위한 미성년자 모집, 성폭력, 강제 결혼, 이주 여정에서 그들이 겪거나 목격하게 되는 잔학 행위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의 존엄이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짓밟힙니다.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취약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주 아동”을 주제로 한 2017년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교황 담화에서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이주 아동은 “어린이며 이방인이고 자기방어 수단이 없어서 삼중의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 이유들 때문에 고국을 떠나 자신의 가족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을 도와줄 것을 모든 이에게 요청합니다.”그러나 이 깊은 어둠 한가운데서도 연대의 빛은 바래지 않습니다. 길 반대쪽으로 지나쳐 버리지 않기로 한 많은 개인과 가정, 시민 단체와 교회 공동체가 있습니다(루카 10,29-37 참조). 우리는 이 어린이들이 보금자리의 온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자기 집의 문을 열어 주는 가정들을 생각합니다. 또한, 환대 센터에서 봉사하는 교육자들을 기억합니다. 이주 여정에서 그리고 우리의 도시들에서, 이 작은 이들이 받은 보이지 않는 상처들을 치유하고자 날마다 헌신적으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과 구호 활동가들도 떠올려 봅니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사랑은 무관심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이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라도이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우리 양심을 깊이 일깨우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이 말씀은 숫자나 통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 수를 헤아리지 말라고 초대합니다. 단 한 명이라도 말입니다. 모든 어린이, 모든 인간은 무한한 존엄성을 지닙니다. 저마다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창세 1,26 참조) 주님의 현존을 드러냅니다. 모든 이주 아동 앞에서 우리는 인류애와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부름받습니다. 그 아동 안에 계시는 주님을 환대하고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또 다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부르심은 더욱 절박해집니다. “너희는 ……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마태 25,35).안타깝게도, 이주 아동들은 그들을 보호하고 지지해 줄 어른들이 없어서 더 쉽게 외면받곤 합니다. 그러하기에, 출신 국가에서는 이들을 피난길에 오르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개입이 필요하고, 경유 국가와 도착 국가에서는 이들에 대한 보호와 환영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동들의 울음소리는 탈출기에서 들려오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처럼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7-8). 하느님께서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들을 해방하시고자 강하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양심에 호소하시고 행동을 촉구하십니다. 우리는 무관심한 채 그러한 고통에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모든 이가 책임을 다하도록 호소하며이 어린이들은, 그들 가운데 한 명일지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 안에서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두려움과 꿈에 깊이 귀 기울이고,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통계 수치로 인간을 전락시켜 버리는 무관심을 극복하라고 부름받습니다. 이는 이주 아동이 놓인 ‘이주민’이라는 처지를 고려하기에 앞서 그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생명권과 교육권과 같은 기본권을 보호하며, 신체적, 정신적, 영적, 도덕적, 사회적 측면에서 온전히 성장할 수 있는 생활 수준을 보장하라는 초대입니다.이 어린이들은, 그들 가운데 한 명일지라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삶 안에서 환대를 추상적 개념이 아닌 확고한 사목적 실천으로 옮기도록 부름받습니다. 이 임무를 그저 고유한 은사를 지닌 기관이나 단체에만 맡겨 둘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구체적인 얼굴들 앞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는 이 어린이들을 자신의 아들딸로 여기고 그들 각자의 구체적인 이야기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난민과 이주민의 통합을 증진하고 그들을 교회 가족의 온전한 일원으로 소중히 여기도록 장려해야 합니다. 또한, 단순히 원조한다는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개인 맞춤형 여정을 포함한 새로운 교육적 영적 여정들을 육성해야 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주민 자녀들에게도 자주 영향을 미치는 고독, 고립, 배척을 예방하고,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과 이주해 온 젊은이들이 상호 존중과 연대와 우정의 길을 걸으며 서로를 지지할 수 있는 만남과 통합의 기회를 증진하는 것입니다.이 어린이들 가운데 단 한 명일지라도, 서로 다른 종교들의 지평에서 바라볼 때,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이들의 취약함은 종교적 경계를 넘어 인도주의적이고 영적인 공동의 책임으로 우리를 묶어 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체적인 종교 간 대화를 위한 비옥한 토양이 되고, 그 안에서 신앙인들은 저마다 초월에 대한 고유한 감각을 바탕으로 보호망을 촘촘히 엮어 나가는 데에 협력합니다. 신앙 공동체들은 모든 소년 소녀가 고유의 문화 정체성 안에서 존중받고 가치를 인정받는 공간들을 만들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극단주의 집단들이 주도하는 급진화에 휩쓸릴 위험을 예방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한 명의 어린이를 보호하는 것은 그 어린이 안에 새겨진 하느님 모습을 지키는 것입니다.이 어린이들은, 그 가운데 한 명일지라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민 사회의 제도적 맥락에서 ‘아동 최선의 이익’이라는 원칙을 재천명하라고 부름받습니다. 공공 단체와 민간단체는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의 보호와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효과적인 법적 보호 수단을 마련하고, 가족 재결합을 촉진하며, 가족의 분리로 말미암은 정신적 외상을 예방할 필요가 있습니다. 관점의 전환이 시급합니다. 논의의 초점이 단순한 이주 관리에서 벗어나 온전하고 즉각적인 인권 보호로 옮겨져야 하고,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보호와 환대, 진정한 통합의 기회를 보장할 수 있도록 조정하고 지원하는 효과적인 대응책”(레오 14세, 스페인 의회에서 한 연설, 마드리드, 2026.6.8.)을 채택해야 합니다.이주민과 난민 어린이들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성적 보호에 맡겨 드립시다. 성모님께서는 요셉 성인과 아기 예수님과 함께 헤로데의 잔혹한 폭력과 이집트로의 피난이라는 비극을 겪으셨습니다(마태 2,13-15 참조). 성모님께서 이주민과 난민 어린이들의 발걸음에 동행하시고, 우리 공동체들이 복음의 살아 있고 신뢰할 만한 표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빕니다.바티칸에서2026년 8월 11일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레오 14세 교황<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Leo XIV for the 112th World Day of Migrants and Refugees 2026, Even Just One of These Children (cf. Mt 18:10), 2026.8.11., 이탈리아어도 참조>영어:https://www.vatican.va/content/leo-xiv/en/messages/migration/documents/20260811-world-migrants-day-2026.html 이탈리아어:https://www.vatican.va/content/leo-xiv/it/messages/migration/documents/20260811-world-migrants-day-2026.html[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61404?gb=K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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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2025년 제111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담화

제111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담화(2025년 9월 28일) 이주민, 희망의 선교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오늘날 세계의 모든 이는, 지속되는 전쟁과 폭력, 경제적 불안감, 극심한 기후 변화로 일어나는 자연재해로 그 어느 때보다도 생존에 대한 위협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처럼 생존에 대한 위협이 커질수록, 세상에서 가장 먼저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불확실한 미래와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고향을 떠나 피난처를 찾는 이주민과 난민의 삶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날의 풍요로움과 장밋빛 미래 전망은 점점 희미해지고, 경제 위기 속에서 마약 중독률과 자살률이 높아지며,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구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특히 젊은 세대는 자신들이 마주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다양한 형태로 이주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주를 선택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에게 결핍된 것을 찾고자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희망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넣어 주신 행복을 바라는 덕이며, 사람들의 활동을 고취시키는 갈망을 하나로 모은다.’고(1818항 참조)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믿음은 희망의 보증이며, 우리가 희망을 간직하는 것도 곧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전쟁과 기후 변화 등 위기의 상황과 환경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사실 실제 위기는 우리가 위기의 상황에서 희망을 잃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이 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마치 열정 없이 고백하는 사랑과도 같습니다.이러한 의미에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향한 ‘희망’을 간직하고 길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이주민과 난민들은 그 존재만으로 ‘희망의 상징’이며 낯선 곳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희망의 선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만나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이겨 내며 희망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들의 여정 안에서, 하느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주는 믿음의 희망을 새롭게 체험합니다. 또한 그들의 믿음 안에서 용기를 얻고, 하느님의 이끄심을 발견하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깨닫게 됩니다.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풍요로움을 지키고자 다른 집단을 배척하고 개인이 속한 한정된 집단만을 앞세우는 경향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풍요로움이 우리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데에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하여 우리가 모두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우리의 믿음에 희망을 주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그 희망입니다.한편 이주민과 난민들이 간직한 희망은 그들만의 노력으로는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들을 환대하고 보호하며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이웃들의 노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주민과 난민들의 존재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의 다른 모습으로, 당신 교회에 새로운 힘과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여는 기회로 인식되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이주민들의 희년’과 ‘선교 분야의 희년’에 맞추어 지내는 제111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을 맞이하여, 저는 한국 사회의 모든 이주민과 난민이 저마다 삶의 터전에서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참된 복음 선포자요 희망의 선포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하며 응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모두 이주민과 난민들과 이루는 만남과 나눔으로 우리 사회의 새로운 동력과 희망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우리가 간직한 희망, 그 믿음의 씨앗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싹을 틔워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서로 돕는 것은, 이 세상의 나그네이며 순례자로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시노드 교회의 사명입니다. 2025년 9월 28일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위원장 정 순 택 대주교올해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은 로마에서 10월 4일과 5일에 거행됩니다.그러나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정기회의에서, 해당 기간이 한국의 추석 연휴와 겹치는 점을 고려하여 예년과 마찬가지로 9월 마지막 주일인 28일에 거행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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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2025년 제111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교황 담화

레오 14세 교황 성하의2025년 제111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담화(2025년 10월 4-5일)이주민, 희망의 선교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선임 교황님의 바람에 따라 ‘이주민들의 희년’과 ‘선교 분야의 희년’에 맞추어 지내게 된 제111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은 우리에게 희망과 이주와 선교의 연관성에 관하여 성찰할 기회를 줍니다.오늘날 지구촌의 상황은 안타깝게도 전쟁과 폭력, 불의, 극심한 기상 이변으로 얼룩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피난처를 찾아 고향을 떠나도록 내몰리는 실정입니다. 한정된 집단의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만연하여 책임 분담, 다자 협력, 공동선 추구, 온 인류 가족의 선익을 위한 국제 연대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군비 경쟁 가능성과 핵무기를 포함한 신무기 개발, 계속되고 있는 기후 위기의 악영향에 대한 성찰 부족, 그리고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여파로, 현재와 미래의 도전 과제는 점점 더 막중해지고 있습니다.위협적인 시나리오와 지구 황폐화의 가능성에 직면하여, 평화가 넘치는 미래, 모든 이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미래를 향한 갈망이 사람들 마음속에 점점 더 자라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미래는 인류와 다른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 계획에서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이는 예언자들이 미리 내다본 메시아 시대입니다. “나이가 많아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든 남녀 노인들이 다시 예루살렘 광장마다 앉아 쉬리라. 도성의 광장마다 뛰노는 소년 소녀들로 가득 차리라. …… 정녕 평화의 씨앗이 뿌려지리라. 포도나무는 열매를 내주고 땅은 소출을 내주며 하늘은 이슬을 내주리라”(즈카 8,4-5.12). 이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마르 1,15; 루카 17,21 참조). 우리는 그 미래가 완전히 실현되리라 믿고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당신 약속에 성실하시기 때문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희망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넣어 주신 행복을 바라는 덕[입니다]. 희망은 사람들의 활동을 고취시키는 갈망을 받아들[입니다]”(1818항). 더 나아가, 행복의 추구 그리고 출신 지역 밖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전망은 분명 오늘날 사람들이 이주하는 주된 동기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주와 희망의 이러한 관계는 우리 시대의 많은 이주 경험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이주민, 난민과 실향민은 희망의 특권적 증인입니다. 실제로, 온전한 인간 발전과 행복의 가능성이 언뜻 비치는 미래를 찾아 나선 그들은 역경에 맞닥뜨려도 다시 일어나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날마다 이 희망을 입증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긴 여정을 걸어간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이 그들의 삶에서 반복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당신 백성에 앞서 나아가실 제, 당신께서 사막을 행진하실 제, 땅이 뒤흔들리고, 하늘마저 물이 되어 쏟아졌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시나이의 그분,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당신께서는 넉넉한 비를 뿌리시어, 메마른 당신 상속의 땅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당신의 무리가 그 위에 살고 있으니, 하느님, 당신께서 가련한 이를 위하여, 호의로 마련하신 것입니다”(시편 68[67],8-11).전쟁과 불의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주민과 난민은 희망의 전령으로 서 있습니다. 이들의 용기와 강인함은 신앙에 대한 영웅적 증거입니다. 신앙은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것 너머를 보고 이들에게 현대의 다양한 이주 경로에서 죽음을 이기는 힘을 줍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보호를 신뢰하며 온갖 위험을 직면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떠돌던 그 경험과의 뚜렷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새잡이의 그물에서, 위험한 흑사병에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당신 깃으로 너를 덮으시어, 네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 그분의 진실은 큰 방패와 갑옷이라네. 너는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밤의 공포도, 낮에 날아드는 화살도, 어둠 속에 돌아다니는 흑사병도, 한낮에 창궐하는 괴질도”(시편 91[90],3-6).이주민과 난민은, 교회가 궁극적 본향을 향하여 영원한 여정을 떠나며 대신덕인 희망으로 지탱되는 자신의 순례적 차원을 상기하게 해 줍니다. 교회가 ‘안주하고픈’ 유혹에 굴복할 때마다, ‘순례하는 도성’(civitas peregrine), 곧 천상 본향을 향하여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이 되기를 멈출 때마다(성 아우구스티노, 「신국론」[De Civitate Dei], 14-16 참조), 교회는 더 이상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요한 15,19 참조). 이러한 유혹은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 만연하여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교회에 이렇게 상기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0-21).특히 오늘날 가톨릭 이주민과 난민은 그들을 받아들이는 나라에서 희망의 선교사가 되어,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가닿지 못한 곳에서 믿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갈 수도 있고 일상의 삶과 공동의 가치 추구에 바탕을 둔 종교간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의 영적 열성과 활력으로, 영적 사막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경직되고 침체된 교회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존재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진정한 복으로, 당신 교회에 새로운 힘과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여는 기회로 인식되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복음화를 위한 첫 번째 요소는 증거입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이를 강조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증거를 보이도록 부름받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은 참된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특히 이주해 간 나라에서 이주민들이 져야 할 책임을 생각합니다”(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21항). 이것이 바로 이주민들이 수행하는 선교 사명, 곧 참다운 ‘이주민 사명’(missio migratium)입니다. 이 선교 사명을 위해서는 교회들 사이의 효과적인 협력을 통한 적절한 준비와 지속적인 지원이 보장되어야 합니다.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공동체들 또한 희망의 생생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닌 존엄성을 인정받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입니다. 그리하여 이주민과 난민은 한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이며 형제자매로 인정받아, 공동체 생활에 온전히 참여하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교회가 모든 이주민과 난민을 위하여 기도하는 이번 ‘이주민들의 희년’을 맞이하여, 저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든 이와 그들을 동반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는 이들을 이주민들의 위로이신 동정 마리아의 모성적 보호에 맡겨 드립니다. 동정 마리아께서 그들 마음속에 희망이 살아 있도록 지켜 주시고, 우리 여정의 끝에서 기다리는 참된 본향인 하느님 나라를 더욱 닮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헌신하도록 그들을 북돋워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바티칸에서2025년 7월 25일성 야고보 사도 축일레오 14세 교황<원문: Message of Pope Leo XIV for the 111th World Day of Migrants and Refugees 2025, Migrants, Missionaries of Hope, 2025.7.25., 이탈리아어도 참조>영어: https://www.vatican.va/content/leo-xiv/en/messages/migration/documents/20250725-world-migrants-day-2025.html이탈리아어: https://www.vatican.va/content/leo-xiv/it/messages/migration/documents/20250725-world-migrants-day-2025.html[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50379?gb=K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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